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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엄마가 읽은 책 ☆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 호우잉 저_ 신영복 역_ 다섯수레출판사_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때, 그리고 그냥도 재밌는 책_그리고 이수다의 인생얘기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호우잉 저 _구판 표지

 

 

안녕하세요. 이수다입니다.

 

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리뷰해 보고 싶어서 글을 조금씩 씁니다.

 

당연히 최신의 책들도 계속 사들이고 조금씩 발췌독하고 있어요.

 

저는 직장인이고, 워킹맘이니까 딱 맘 잡고 책 읽기가 쉽지는 않네요.

 

하지만,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서 세탁기를 돌려 놓고는

 

조금씩 끄적여 봅니다.

 

제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저와

제 생각과

아이에 대한 이 글들을

저희 아이가 봐주길 바라기도 하고

 

그렇다고 글에 어떤 기교나 가식을 섞어가며 멋있는 척을 하고 싶진 않구요.

 

그냥 좋은 마음, 좋은 글, 좋은 물건에 대한 정보들을 나누고자 하는 제 글 속에서

제 생각과 가치관들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하며 글을 적고 있어요.

 

이 책은~

그러니까 2002년에 읽었던 책이에요.

 

그땐 사실, 상식이 풍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양으로 중국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거든요.

 

왜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그냥!

그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생각보다 빡센 수업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이와 더불어 허삼관 매혈기도 읽게 하시고

당시 교수님께서 또 다독을 권하셨죠.

 

저는 국어교육과 입학, 사대 입시에 실패하면서

 

일반 국문학과에 재학하게 되었고,

 

오랜동안 교사의 꿈을 가져왔기에.

 

일반대학에서

교직이수라는 것을 할 자격을 얻기 위해

(당시 저희 대학은 3학기 평균, 재학생중 5등 안에 들었어야 교직이수 자격 획득을 했어요.)

 

그 당시의 저는 학점 고득점을 위해 모든 세포가 집중되어 있었어요.

 

다들 3학기 평균 5등 안에 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포기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말을 해주신 분들의 말씀이 제게는

강력한 기폭제가 되어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유지하게 해줬어요.

 

그 말씀들이 고맙게 저는 정말 악착같이

수업에 들어오시는 교수님들의 모든 논문을 달달 외우고

책들을 씹어 먹을 기세로 페이지까지 외워가며 공부했었어요.

 

진짜 독하게,

독하게 공부했던 기간이었어요.

 

물론 그 말이 무색하게 지금은 그 공부기간을 포기하고

일반 기업에서 일하고 있지만요.

 

정말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

 

그때 열심히 살았던 그 시간이

알게 모르게 제 인생에 항상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서두가 길었네요.

 

사람아 아, 사람아!

이 책의 저자인 다이호우잉님은

1996년에 돌아가셨어요. ㅠ,ㅠ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돌아가셨지요.

 

다이호우잉 (다이 허우잉)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아래에 두산백과 내용을 기재해 두었으니 참고하세용!

 

이 분의 인생이 이 책에 녹아들어 있어요.

 

언뜻 이해가 안 되실 분들을 위해

이 분의 삶과 소설 속 이야기 매칭되는 부분을 별도로 기재할게요.

 

 

1966년 문화 혁명과 함께 혁명 대령릐 전사로 참가했다가

당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던 시인 웬졔와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난을 받았다고 나와요.1968년 당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던 중국의 저명한 시인 웬졔[]를 조사하는 심사단원으로 참가한 후, 5·7간부학교에서 다시 그를 만나 비극적 사랑을 하게 되고,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난을 받았다. 이 무렵 남편에게 이혼 신청을 받음과 동시에 반혁명 대자보비판을 받았다. 1970년 고난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간 웬졔와 함께 당에 결혼신청을 하지만 허락받지 못하자, 1971년 웬졔는 자살을 하였다. 이 시기의 고통스런 경험은 훗날 《시인의 죽음[]》이라는 자전적 소설로 작품화되었다.

 

 

다이호우잉

[ Dai Houying ,  ]

요약 매스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안개 속의 꽃'이라고 불리는 중국 현대여성작가. 반 우파 투쟁시기와 문화대혁명을 거쳐 발표한 작품은 간행과 동시에 작품내용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는 등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사람아 아, 사람아》,《하늘의 발자국소리》등이 있다.

출생-사망별칭국적활동분야출생지주요작품

1938.3.18 ~ 1996.8.25
안개 속의 꽃
중국
문학(소설)
중국 안후이성 잉상현
《사람아 아, 사람아》《시인의 죽음》《하늘의 발자국소리》

인터뷰나 매스컴에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안개 속의 꽃'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중국의 현대여성작가이다. 1938년 3월 18일 중국 안후이성[] 잉상현[] 화이허[]의 시골마을에서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점 점원이었고, 어머니는 공장의 미싱사였다. 1956년 상하이의 화둥사범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했다. 1960년 3월 화둥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상하이작가협회 문학연구소에서 문예평론활동을 시작했다. 1961년 어릴 적 친구와 결혼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혁명전사로 활동했다. 1968년 당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던 중국의 저명한 시인 웬졔[]를 조사하는 심사단원으로 참가한 후, 5·7간부학교에서 다시 그를 만나 비극적 사랑을 하게 되고,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난을 받았다. 이 무렵 남편에게 이혼 신청을 받음과 동시에 반혁명 대자보비판을 받았다. 1970년 고난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간 웬졔와 함께 당에 결혼신청을 하지만 허락받지 못하자, 1971년 웬졔는 자살을 하였다. 이 시기의 고통스런 경험은 훗날 《시인의 죽음[]》이라는 자전적 소설로 작품화되었다.

1972년 상하이시 당위원회의 창작그룹에 배치된 후 4년 동안 대학교재 편집, 외국문학 소개 등의 일에 종사했다. 1979년 상하이의 푸단대학교[] 중문학부로 전임되었으며, 1980년 동대학의 분교인 상하이대학교로 전근되었다. 1980년 이후 상하이대학교에서 문예이론을 담당하면서 창작활동에 몰두, 1980년대 중국대륙의 문학계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면서 중국현대 휴머니즘문학의 기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반우파 투쟁시기와 문화대혁명을 거쳐 개방화의 물결 속에서 발표한 작품은 간행과 동시에 작품내용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는 등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으며, 중국 당국으로부터 금서() 조치를 당하는 등 오늘날까지도 찬반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한때 작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며, 1997년 상하이의 자택에서 조카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상하이신문에 실렸다고 전해지는 등 작가의 신변에 대한 불확실한 정보가 떠돌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자전적 성격을 띤 장편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1980) 《시인의 죽음》(1982) 《하늘의 발자국 소리[]》(1985) 등이 있다. 이 세 장편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변기를 겪은 중국 지식인들의 연대기를 그린 '3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의 저서로 중단편소설집 《부드러운 사슬》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이호우잉 [Dai Houying, 戴厚英] (두산백과)

 

 

 

 

우선 이 책을 읽으시려면

문화대혁명에 대해 조금은 공부를 하고 읽으시는 게 좋아요.

 

아래에 또!! 두산백과의 내용을 추가해 두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스크롤 바를 맨 아래로 내리셔서 읽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당시 사람아 아 사람아 이 책과 더불어 추천할 만한 영화가 '인생'이라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예요.

 

 

제가 중학교 때 공리를 엄청 좋아했어요.

그냥 그 평범한 나와 비슷한 얼굴의 사람이

잔잔히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몰입이 잘 되더라구요.

 

정말 그 인생이 그렇게 살고 있는 걸

관찰하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던 것 같아요.

 

1995년 즈음에

당시에는 도서대여점과 비디오대여점을 병행영업하는 업체들이 많았는데,

 

80년대생들은 좀 아실 거예요.

 

거기서 여러번 빌려봤어요. ^^

 

아~ 옛날 얘기네요.

 

인생, 이 책과

사람아 아 사람아 이 책이 정말 내용이 많이 맞닿아 있어서

 

사람아 아 사람아 책을 이해하는 데도 더 도움이 되었고

또,

이 영화의 원작은

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님의 '인생'이라는 책인데

 

이 인생이란 영화는

1994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영화예요.

 

인간이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역사와 환경의 변화 앞에

삶이 휩쓸리지만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또 그렇게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달까요

 

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봐왔지만

매번 새롭고

매번 인생을 다시 보게 하더라구요.

 

그리고 제 삶 역시 이러한 격변의 시기 안에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하더라구요.

 

그 역사 속에서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받는지에 대해서도

사색을 깊이 해보게 하는 영화예요.

 

이 영화도 오래된 영화이지만 추천드려요.

 

영화 인생_ 장예모감독_공리,갈우 주연_칸영화제심사위원대상수상작_중국영화인생추천

 

책 얘기를 하다가..

영화 얘기를 길게 하고 있네요.

 

 

사람아 아, 사람아!

 

이 책은 휴먼에세이로도 분류되고

중국소설로도 분류되어요.

 

 

중국의 역사를 뼈아픈 역사를 

사람에 대한

사람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가

그러한 격변의 시기를 또 지구 어디에선가 했었을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에요.

 

저는 이 책을 읽고 가장 많이 든 감정은

슬프다.

슬프다.

마음 아프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중국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께

중국 역사를 알고 싶으신 분께

신영복 작가님의 훌륭한 번역을 보고 싶으신 분께

 

그리고 삶을 돌아보고 싶은 분께

역사 앞에 인간의 삶의 본질은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

이데올로기와 신념의 문제.. 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분들께

 

아주 좋은 책일 거라

 

아주 좋은 교양서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최근 표지 바뀐 본_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호우잉

 

 

 

이 책을  2004년에 친구 빌려주곤 못 돌려 받았었는데

새로 사야겠어요

 

새벽 6시부터 시작한 글 작성을 오전 7시에 마칩니다.

 

와.. 1시간이 걸렸어요. ㅠㅠ

 

저는 이만 오늘도 직장으로 출근하러 갑니다! ^^

 

 

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수천만명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이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생겨났다.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중노선을 주장하였으나, 류사오치[덩샤오핑[]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각 분야별 전문가를 우선시 할 것을 주장하였다.

무너진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 (,유소기)와 덩샤오핑 (,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문화대혁명의 발단

1965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야오원위안[]은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를 계기로 실권파의 권력기반이었던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삼가촌()그룹은 마오쩌둥 추종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1966년 4월 베이징 시장 펑전[]이 해임되고,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

1966년 8월 톈안먼[]광장에서 백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다. 또한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전국 각지에서 실권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

그러나 실권파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홍위병에 내분이 발생하자, 1967년 1월 마오쩌둥은 린뱌오[]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각지의 학교·공장·정부기관을 접수하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였던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깊숙한 산골로 추방하였다.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은 1968년 9월 전국 각지에 인민군대표, 홍위군대표, 당간부의 3자 결합으로 ‘혁명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국방장관 린뱌오가 후계자로 옹립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1971년 린뱌오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하고,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바쳤던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1973년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한 후부터,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데올로기·계급투쟁·평등주의·배외주의를 강조한 반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지지 세력은 경제성장·교육개혁·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주장하였다.

말년에 마오쩌둥은 두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화궈펑[]에 의해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 세력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문화대혁명은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극찬을 받았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네** 지식백과]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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